[습작] "오늘도 쌈밥을 먹었습니다" 과학소설/하위문화담

요즘 기자들 녹취는 폰으로 하지 않는거에요? 신기하네요. 녹음 워치가 따로 있다니. 전 녹음은 폰으로 하거든요.


이 말로 첫마디를 시작하게 되네요. 네, 오늘도 전 밥 맛있게 먹고 살고 있습니다. 

점심엔 우렁쌈에 밥 씹어서 평범하게 먹었어요. 맛이 어땠냐구요? 그냥 먹을만 했어요. 아침은 빵과 우유로 먹었구요. 

대단한 묘사는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먹방 DJ가 아니니까요. 


사실 몇 년 전이었으면 밥을 무엇을 먹었는지도 별 이야기 하지 않았을 거에요.

어찌나 관심들이 많은지. 네, 어차피 이 인터뷰를 하게 된 원인도 그거잖아요? 

녹말이 아니라 섬유질 셀룰로오스를 분해시키는 효소. 2024년 기사 '밥 대신 배추김치로 에너지를 얻어요'. 맞아요. 그게 저였잖아요.

대학 초년에 우연히 진행한 인터뷰였죠.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J신문 기자는 그 멘트를 헤드라인으로 뽑아버리더라구요. 

나중에 미안하다고 편지가 왔던 것 같긴 한데, 몇줄 읽자마자 바로 지워버렸으니까 생각도 안 나요. 망할. 


덕분에 그 학기는 휴학하게 하게 되었죠. 그때 베댓이, '진정한 김치 워리어'였던가? 

전 별로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데, 밥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잖아요. 도리어 흰 쌀 밥은 기피하기도 하고. 제가 그랬어요.

학교 근처에서 뭘 먹을 때마다 어찌나 사람들이 쳐다보던지, 소화가 안 돼서 1년은 쉬었어요. 

학교를 옮길까 했는데, 그냥 밥만 안 먹으면 되는 거더라구요. 편의점 가서 스낵과 쥬스을 먹었요. 

네, 야채 쥬스에도 섬유질이 있죠. 그걸 노리고 먹는 건 아니라구요. 계속 이러시면 인터뷰 하지 않을 겁니다.

미안하시다니 다행이네요. 제발,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을 때 하게 해주세요.



상상력이 좋은 사람들은 풀이나 나무만 뜯어먹어도 되는 초식동물이 아니겠냐고 하더라구요. 

궁금해서 몇 번 뜯어먹었는데, 생 쌀을 논에서 뽑아 먹는 거랑 다를 바가 없겠구나 싶더라구요. 

초식동물은 말이죠. 일단 잘 씹구요. 되세김질을 합니다. 저는 그런거 안 해요.

놀사찾. 네, 놀라운 사람들을 찾는 사람들. 거기서 몇번 부르더라구요. 출연료로 500만원을 준다면 부를 겁니다. 

매회 1등 당첨금이 그정도던데. 그런데 이제 이런 소재로는 1등도 못하죠. 


일단 가장 먼저 밝힐게 있는데, 제 췌장에서는 아밀레이즈가 잘 나와요.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요.

어차피 씹지도 않고 꿀떡 꿀떡 삼키는 사람들이랑 다를게 없단 말이에요. 

췌장에서도 전분 분해 효소가 안 나왔다면 뭐가 좀 달랐을까요? 그럼 전분 안 먹는 사람들은 다 죽었을까요?

그 부분만 강조해주세요. 췌장에서 아밀레이즈가 나오기 때문에 똑같습니다. 



아, 어머니 이야기 말이죠. 그래요. 어머니는 유명한 소화기 내과 의사였죠. 

어머니가 절 수정할 때 어느 정도 유전 결함요소를 없엤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남들도 하는 정도였죠. 몇 개 보인자 없에고,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게 하는 정도. 그래봐야 키는 180 조금 넘지만.

아직도 어머니는 담당 의사와 말도 섞지 않아요. 생각을 하다하다 효소 실험 대상으로 자기를 이용한게 아닌가 싶으셨대요.

그럴지도 몰라요. 위산 효소가 없었다면 저도 그 김효의 박사를 두고두고 원망했을 거에요. 기사엔 A 박사로 나가죠? 좋네요.


하지만 진짜 힘든 건 어머니가 각종 효소제를 삼시 세끼 먹일 때였어요. 

한번은 밥에다가 아밀레이즈를 뿌려서 주신 날도 있어요. 진짜 맛 없었어요. 밥에다 설탕 뿌려먹는 걸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양반이었죠. 밥상을 풀밭으로 만들어놓는 것만 빼고는 준수했어요. 

주말마다 밥을 집에 가서 먹는데, 아버지가 3주 연속으로 배추국만 줘서 뭐라고 한 적도 있어요.


소소한 고민은 재체기를 할 때 휴지를 쓰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이건 오프 더 레코드로 해주세요.

네, 휴지에서 단 맛이 나요. 물티슈는 주로 화학 섬유니까 그걸 쓰죠. 

말을 할 때 입에서 튀어나올까봐 미술 수업은 묵언 수행처럼 했었죠. 일반 수업은 종이 책이 사라진 뒤로는 좀 나았구요.

조금은 써도 되지 않나구요? 아니요. 입만 열면 염산이라도 나오는 에일리언처럼 조롱받고 싶진 않네요.


이 정도에요. 전 아주 평범하게 살고 있어요. 자건거를 좋아하고, 마스크를 끼고 하긴 하지만 목공예도 좀 합니다. 

식품의약부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저 전공이 어머니 영향으로 약학이었기 때문이라구요.

항정신성 의약제를 담당하고 있어요. 들어가자마자 네오소마가 큰 유행이라서 그걸 금지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물론 보고서는 선배들이 썼고, 전 허드렛일 위주였지만.

효소 제품 파트는 일부러라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회의에서 한번 초청한 적이 있는데, 좀 신경쓰여서 가진 않았어요.

지난 국감에서 한 의원님이 제 이야기를 꺼냈었죠. 자유공화당 의원님이었나. 

별로 이슈가 되진 않았는데, 부서 입장에선 조금 신경이 쓰였나봐요.

그래서 이 인터뷰를 하게 된 거죠.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내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사실 전 타이틀로 뽑으신다는 "오늘도 쌈밥 먹었습니다'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아요. 하지만 6년 전 기사 제목보다는 낫네요.

부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주세요. 

거문고자리 주저리주저리

방명록을 열었습니다.


[후기신라 내전기] 김헌창의 난 (지도) 사(史)담

짤방을 마련하기 귀찮아서  "원성왕 헌덕왕은 신라의 세조" 드립에 어울리게 공주의 남자를 차용하기로 했습니다. 

신라의 난 가운데 (말기를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난은 김헌창의 난이었을 겁니다.

비슷한 규모라면 장보고가 개입한 것으로 유명한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의 내전이 있겠네요. 
(이 내전에는 특별한 명칭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바지사장 선덕왕을 앞세워서 내물왕(원성왕)계 왕조를 이룩한 우리의 주인공 김경신(미래의 원성왕).

하지만 원성왕에게는 부담되는 혹이 하나 있었으니, 유력 왕족 김주원이었습니다. 

병부령 김주원은 혜공왕 시절 시중을 지냈고,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혹은 무열왕의 3남 문왕)의 후손으로서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덕왕이 승하하자 이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거 손을 못쓰겠는데요 다리가 끊겼어요"
본 짤방은 세빛둥둥섬입니다


그 유명한 북천의 강이 불어서 못건너고 어쩌고... 하는 떡밥에서 보듯이.. 

"아니 이놈이 어디서 내가 만든 왕위를 먹을려고 들어?"
신라는 당의 관복을 입었으니 왕도 복두를 쓴 건 고증에 맞습니다

일찌기 선덕왕이 즉위하는 쿠데타(김지정의 난)에 참여하여 정권의 최대주주가 된 원성왕에게 밀리게 됩니다.

무열왕에 밀린 알천공 시즌투가 된 김주원은 그래서 명주(冥州 = 하슬라, 지금의 강릉)으로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원성왕계가 김주원을 쫓아가 죽일 정도는 또 안되었다는것.

"에이X, 너 거기서 동네 영주나 해먹고 나오지나 마라."

결국 원성왕 이후의 왕들은 김주원,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우대함으로서 반란을 방지하는 우호책을 채택합니다.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임명하고, 대대로 명주도독을 해먹게 한 것이었죠. (그리고 이 가문이 강릉김씨의 시조가 됩니다.)

세월이 좀 흐르고, 나름대로 초기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그랬는지, 
아니면 도리어 중앙으로 불러 감시를 하려고 했는지, 슬슬 이 집안이 중앙 정계에 진출합니다. 

김주원의 맏이인 김종기가 원성왕 때에 세습직인 명주도독에 얹어서 제3관등 소판과 시중을 맡겨 중앙에 진출합니다.
(여담인데 이분이 벽골제堤를 증축해서 그쪽 문중에서는 전북 김제가 '金'종기나 후손 '金'양의 벽골'堤'에 딴 거라는 떡밥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얼마 뒤 천재지변을 이유로 사직을 하게 되어 큰 활약은 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둘째인 김헌창. 
아마도 김헌창이 주도독을 세습해야 하는 김종기보다 여러모로 중앙정계에 적극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왕가의 정책적인 예우와 더불어 중앙정계에서 승승장구..

김헌창이 크게 부각되는 애장왕 말기의 조정을 보면, 훗날 헌덕왕이 되는 섭정 김언승이 상대등을 맡고, 
반대로 김헌창은 시중을 맡게 되면서 조정의 2인자가 됩니다.
옙. 전형적인 상대등(진골)과 시중(왕권) 갈등입니다. 

혜공왕 때 김주원(시중) vs 김양상(선덕왕, 당시 상대등)을 생각하면 시즌2!
 
더구나 애장왕의 나이가 어리고, 숙부인 김언승이 그 쿠데타 유전자 어디갈까 왕위를 노리면서 
뭔가 구도가 김종서와 수양대군 같이 되어버립니다. (잠깐, 혜공왕 때도 비슷하지 않았어?) 

"어쭈구리. 다시 이 구도네."

(사실 김헌창이 이 과정에서 김종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세대적으로 김언승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에서, 대략 이런 대입이 가능하지도 않을까 하고 
--쉽게 이해시키겠다는 핑계도 겸해서-- 변명해봅니다.)

잠시 원성왕의 자손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원성왕을 신라의 세조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다음과 같은 공통점 때문입니다.
새로운 방계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을 했고, 왕권을 강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손이 귀했습니다. 

즉위하자마자 장자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791년에 사망. 의경세자?
곧바로 차자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더니, 이번엔 의영이 793년에 사망. 예종? 이게 아닌데? 
도로 장손 즉 인겸의 아들이었던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는데, 이분이 799년에 승계를 하고는 즉위 1년만에 사망. 성종도 사망?

그 아들인 김청명(788년생)이 열세살의 나이로 뒤를 이으니, 이것이 애장왕. 신라의 단종...

애장왕은 초기에는 김언승에게 섭정을 맡기고, 김언승도 여러 개혁정책을 시행하지만, 성년이 되면서 애장왕이 독립을 시도합니다.

"삼촌, 그만 물러나시죠"
--왜 금성대군이 김수종(흥덕왕)인거냐--

(807년에 김헌창이 이찬에서 시중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해석하기엔, 이 과정에서 김언승이 동생인 시중 김수종(후의 흥덕왕)이 밀려난 것 같습니다. 
사실 신라사를 읽다보면 시중이 너무 많아 복수의 시중을 두는 건가 싶은 구절들도 있는데, 그냥 제 착각이겠지요.)

결국 이 과정에서 김언승, 김수종, 그외 김제옹(김수종과 동일인물이란 말도 있습니다.) 등의 "삼촌"들은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비상 상황엔 비상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위기를 느낀 삼촌들이 떼지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809년)

아예 애장왕과 그의 동생 시위 김체명을 베어 죽여버린 다음에 왕위에 오르는데..

"더러운 꼴 안본다 이놈들아"

김헌창은 시중을 떼려칩니다. 

하지만 헌덕왕은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813년엔 무진주 도독, 
816년엔 청주(강주) 도독, 
821년엔 웅천주 도독으로 뺑뺑히 김헌창을 외직으로 돌려버립니다. 

김주원 때와 비슷한 행동이었달까요. 하지만 이게 도리어 전국 규모의 난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822년, 드디어 김헌창의 난이 일어납니다.


9주 5소경 가운데 5주 3소경을 먹었어염 뿌우 'ㅁ'/ 
남원, 명주 빼면 3주 1소경 남습니다.. orz 

근본적으로 신라는 하늘색, 김헌창의 장안국, 혹은 반란군은 노란색으로 칠했습니다.
빨간색 x와 삼각형은 주요 전투지. 나중에 따로 진격로 등 추가할 듯.

2.01 : 강주(청주)가 진주에 있고, 김헌창이 청주 도독으로 있었던 것 등을 고려함.
굴자군이 드물게 항복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고려, 강주 일대를 도로 노란색으로 칠함.

2.00 : 남원경, 속함군(함양)을 신라의 영역으로 설정함. 
이로서 낙동강 남부 지방은 김해경을 제외하고는 도로 신라의 영역으로 포함시킴. 
이는 전주 장사(부도독 혹은 도독 보좌격)의 탈출경로로도 합리적인 면이 있음.
(이 과정에서 남부 해안 일부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신)라구(해적)들이 창궐하던 시기라고 지배권이 미치지 못했다고 추정.) 

1.06 : 강주의 경우 굴자군(창원), 추화군(밀양)등이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김해경의 독자적인 반란으로 추측되므로, 김해경 지역을 고립시킴.

1. 명주, 상주, 강주 : 
명주군왕은 일단 사실상의 독립 지역으로 설정. 다만 김헌창의 영역과 서로 연동되진 못했을 것으로 보임. 명주 북쪽은 신라땅.
(문중 글에 명주군왕에게 삼척, 평해 등을 다스리게 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동일한 구절에서 강릉 이북의 땅이 거론 안 됨.)
상주 일부가 하늘색으로 표시되면서 노란색과 주황색이 연결되지 못한건 그 때문. 낙동강 서부를 경계로 함.

2. 전주 :
남원경이 항복했다는 기록이 딱히 없는 것으로 보고, 대신 완산(지금의 전주, 빨간 점) 성주가 간신히 탈출한 것을 감안하여
전주지역 (작은 빨간색)은 노란색의 영역에, 남원경 지역은 흰색 영역에 넣었음.

3. 무주 :
무진주(광주)정도만을 포함하도록 함. 사실 이 난의 주요 지역도 아니고... 

4. 한주, 패강:
청주도독 향영이 몸을 빼서 북방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음. 
한주, 삭주, 북원경(원주)와 더불어 패강을 표기해야하는데, 패강의 정확한 위치가 배정되지 않음.
(패강진에 대한 떡밥은 위키백과 등을 참조할 것.)
헌덕왕이 후에 쌓은 300리의 장성 위치를 감안할 때, 
국경지대인 대동강으로 비정하고 산성만 대강 표시하고, 경계를 확실히 표시하지 않는 정도로 함. 
대동강의 영역이 조금 변경되며 강역이 조금 축소됨. 국경 지움.

기둥 뒤에 공간, 아니 장성 밑에 군진있어요

5. 발해(분홍색)와 완충지대(보라색):
남경 남해부를 중심으로 강역을 표시. 
발해의 세력권은 평안도의 경우 의주를 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에, 대강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 쯤을 대강의 완충지대로 삼음.
(다만 몇가지 설을 감안 할 때, 저 보랏빛 지역은 당시 즉위 4년째이던 선왕의 확장에 따라 발해의 영향권이 강할 측면이 높습니다. 장성 300리도 발해를 방비하려고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구요.) 

남경 남해부는 원 지도는 북청설을 표시했으나 그냥 표시하지 않기로 함. 함흥설, 북청설 가운데 알아서 골라잡으세요.

탐라는 색칠할 필요가 역시 없겠네요.


...

김헌창의 난은 불과 수개월만에 실패했고, 김헌창 스스로도 자결했습니다. 시신은 부관참시 되었다죠?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은 몸을 피해서 3년 뒤인 825년 북한산 도적과 손을 잡고 다시 난을 일으켰지만 도독 총명에게 붙잡혀 처형.
이로서 무열왕계 자손들은 6두품으로 강등되면서 영원히 왕위 계승분쟁에서 배제 됩니다. 
다만 명주지역의 본가는 살아남아 독자적 호족으로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ps. 
왜 원성왕도 수양대군이고 손자 헌덕왕도 수양대군이라고 물으시냐면, 김영철씨는 태종도 했고 세조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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