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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을 열었습니다.


[후기신라 내전기] 김헌창의 난 (지도) 사(史)담

짤방을 마련하기 귀찮아서  "원성왕 헌덕왕은 신라의 세조" 드립에 어울리게 공주의 남자를 차용하기로 했습니다. 

신라의 난 가운데 (말기를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난은 김헌창의 난이었을 겁니다.

비슷한 규모라면 장보고가 개입한 것으로 유명한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의 내전이 있겠네요. 
(이 내전에는 특별한 명칭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바지사장 선덕왕을 앞세워서 내물왕(원성왕)계 왕조를 이룩한 우리의 주인공 김경신(미래의 원성왕).

하지만 원성왕에게는 부담되는 혹이 하나 있었으니, 유력 왕족 김주원이었습니다. 

병부령 김주원은 혜공왕 시절 시중을 지냈고,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혹은 무열왕의 3남 문왕)의 후손으로서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덕왕이 승하하자 이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거 손을 못쓰겠는데요 다리가 끊겼어요"
본 짤방은 세빛둥둥섬입니다


그 유명한 북천의 강이 불어서 못건너고 어쩌고... 하는 떡밥에서 보듯이.. 

"아니 이놈이 어디서 내가 만든 왕위를 먹을려고 들어?"
신라는 당의 관복을 입었으니 왕도 복두를 쓴 건 고증에 맞습니다

일찌기 선덕왕이 즉위하는 쿠데타(김지정의 난)에 참여하여 정권의 최대주주가 된 원성왕에게 밀리게 됩니다.

무열왕에 밀린 알천공 시즌투가 된 김주원은 그래서 명주(冥州 = 하슬라, 지금의 강릉)으로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원성왕계가 김주원을 쫓아가 죽일 정도는 또 안되었다는것.

"에이X, 너 거기서 동네 영주나 해먹고 나오지나 마라."

결국 원성왕 이후의 왕들은 김주원,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우대함으로서 반란을 방지하는 우호책을 채택합니다.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임명하고, 대대로 명주도독을 해먹게 한 것이었죠. (그리고 이 가문이 강릉김씨의 시조가 됩니다.)

세월이 좀 흐르고, 나름대로 초기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그랬는지, 
아니면 도리어 중앙으로 불러 감시를 하려고 했는지, 슬슬 이 집안이 중앙 정계에 진출합니다. 

김주원의 맏이인 김종기가 원성왕 때에 세습직인 명주도독에 얹어서 제3관등 소판과 시중을 맡겨 중앙에 진출합니다.
(여담인데 이분이 벽골제堤를 증축해서 그쪽 문중에서는 전북 김제가 '金'종기나 후손 '金'양의 벽골'堤'에 딴 거라는 떡밥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얼마 뒤 천재지변을 이유로 사직을 하게 되어 큰 활약은 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둘째인 김헌창. 
아마도 김헌창이 주도독을 세습해야 하는 김종기보다 여러모로 중앙정계에 적극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왕가의 정책적인 예우와 더불어 중앙정계에서 승승장구..

김헌창이 크게 부각되는 애장왕 말기의 조정을 보면, 훗날 헌덕왕이 되는 섭정 김언승이 상대등을 맡고, 
반대로 김헌창은 시중을 맡게 되면서 조정의 2인자가 됩니다.
옙. 전형적인 상대등(진골)과 시중(왕권) 갈등입니다. 

혜공왕 때 김주원(시중) vs 김양상(선덕왕, 당시 상대등)을 생각하면 시즌2!
 
더구나 애장왕의 나이가 어리고, 숙부인 김언승이 그 쿠데타 유전자 어디갈까 왕위를 노리면서 
뭔가 구도가 김종서와 수양대군 같이 되어버립니다. (잠깐, 혜공왕 때도 비슷하지 않았어?) 

"어쭈구리. 다시 이 구도네."

(사실 김헌창이 이 과정에서 김종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세대적으로 김언승보다 나이가 많다는 점에서, 대략 이런 대입이 가능하지도 않을까 하고 
--쉽게 이해시키겠다는 핑계도 겸해서-- 변명해봅니다.)

잠시 원성왕의 자손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원성왕을 신라의 세조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다음과 같은 공통점 때문입니다.
새로운 방계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을 했고, 왕권을 강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손이 귀했습니다. 

즉위하자마자 장자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791년에 사망. 의경세자?
곧바로 차자 의영을 태자로 책봉했더니, 이번엔 의영이 793년에 사망. 예종? 이게 아닌데? 
도로 장손 즉 인겸의 아들이었던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는데, 이분이 799년에 승계를 하고는 즉위 1년만에 사망. 성종도 사망?

그 아들인 김청명(788년생)이 열세살의 나이로 뒤를 이으니, 이것이 애장왕. 신라의 단종...

애장왕은 초기에는 김언승에게 섭정을 맡기고, 김언승도 여러 개혁정책을 시행하지만, 성년이 되면서 애장왕이 독립을 시도합니다.

"삼촌, 그만 물러나시죠"
--왜 금성대군이 김수종(흥덕왕)인거냐--

(807년에 김헌창이 이찬에서 시중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해석하기엔, 이 과정에서 김언승이 동생인 시중 김수종(후의 흥덕왕)이 밀려난 것 같습니다. 
사실 신라사를 읽다보면 시중이 너무 많아 복수의 시중을 두는 건가 싶은 구절들도 있는데, 그냥 제 착각이겠지요.)

결국 이 과정에서 김언승, 김수종, 그외 김제옹(김수종과 동일인물이란 말도 있습니다.) 등의 "삼촌"들은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비상 상황엔 비상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위기를 느낀 삼촌들이 떼지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809년)

아예 애장왕과 그의 동생 시위 김체명을 베어 죽여버린 다음에 왕위에 오르는데..

"더러운 꼴 안본다 이놈들아"

김헌창은 시중을 떼려칩니다. 

하지만 헌덕왕은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813년엔 무진주 도독, 
816년엔 청주(강주) 도독, 
821년엔 웅천주 도독으로 뺑뺑히 김헌창을 외직으로 돌려버립니다. 

김주원 때와 비슷한 행동이었달까요. 하지만 이게 도리어 전국 규모의 난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822년, 드디어 김헌창의 난이 일어납니다.


9주 5소경 가운데 5주 3소경을 먹었어염 뿌우 'ㅁ'/ 
남원, 명주 빼면 3주 1소경 남습니다.. orz 

근본적으로 신라는 하늘색, 김헌창의 장안국, 혹은 반란군은 노란색으로 칠했습니다.
빨간색 x와 삼각형은 주요 전투지. 나중에 따로 진격로 등 추가할 듯.

2.01 : 강주(청주)가 진주에 있고, 김헌창이 청주 도독으로 있었던 것 등을 고려함.
굴자군이 드물게 항복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고려, 강주 일대를 도로 노란색으로 칠함.

2.00 : 남원경, 속함군(함양)을 신라의 영역으로 설정함. 
이로서 낙동강 남부 지방은 김해경을 제외하고는 도로 신라의 영역으로 포함시킴. 
이는 전주 장사(부도독 혹은 도독 보좌격)의 탈출경로로도 합리적인 면이 있음.
(이 과정에서 남부 해안 일부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신)라구(해적)들이 창궐하던 시기라고 지배권이 미치지 못했다고 추정.) 

1.06 : 강주의 경우 굴자군(창원), 추화군(밀양)등이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김해경의 독자적인 반란으로 추측되므로, 김해경 지역을 고립시킴.

1. 명주, 상주, 강주 : 
명주군왕은 일단 사실상의 독립 지역으로 설정. 다만 김헌창의 영역과 서로 연동되진 못했을 것으로 보임. 명주 북쪽은 신라땅.
(문중 글에 명주군왕에게 삼척, 평해 등을 다스리게 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동일한 구절에서 강릉 이북의 땅이 거론 안 됨.)
상주 일부가 하늘색으로 표시되면서 노란색과 주황색이 연결되지 못한건 그 때문. 낙동강 서부를 경계로 함.

2. 전주 :
남원경이 항복했다는 기록이 딱히 없는 것으로 보고, 대신 완산(지금의 전주, 빨간 점) 성주가 간신히 탈출한 것을 감안하여
전주지역 (작은 빨간색)은 노란색의 영역에, 남원경 지역은 흰색 영역에 넣었음.

3. 무주 :
무진주(광주)정도만을 포함하도록 함. 사실 이 난의 주요 지역도 아니고... 

4. 한주, 패강:
청주도독 향영이 몸을 빼서 북방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음. 
한주, 삭주, 북원경(원주)와 더불어 패강을 표기해야하는데, 패강의 정확한 위치가 배정되지 않음.
(패강진에 대한 떡밥은 위키백과 등을 참조할 것.)
헌덕왕이 후에 쌓은 300리의 장성 위치를 감안할 때, 
국경지대인 대동강으로 비정하고 산성만 대강 표시하고, 경계를 확실히 표시하지 않는 정도로 함. 
대동강의 영역이 조금 변경되며 강역이 조금 축소됨. 국경 지움.

기둥 뒤에 공간, 아니 장성 밑에 군진있어요

5. 발해(분홍색)와 완충지대(보라색):
남경 남해부를 중심으로 강역을 표시. 
발해의 세력권은 평안도의 경우 의주를 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에, 대강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 쯤을 대강의 완충지대로 삼음.
(다만 몇가지 설을 감안 할 때, 저 보랏빛 지역은 당시 즉위 4년째이던 선왕의 확장에 따라 발해의 영향권이 강할 측면이 높습니다. 장성 300리도 발해를 방비하려고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구요.) 

남경 남해부는 원 지도는 북청설을 표시했으나 그냥 표시하지 않기로 함. 함흥설, 북청설 가운데 알아서 골라잡으세요.

탐라는 색칠할 필요가 역시 없겠네요.


...

김헌창의 난은 불과 수개월만에 실패했고, 김헌창 스스로도 자결했습니다. 시신은 부관참시 되었다죠?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은 몸을 피해서 3년 뒤인 825년 북한산 도적과 손을 잡고 다시 난을 일으켰지만 도독 총명에게 붙잡혀 처형.
이로서 무열왕계 자손들은 6두품으로 강등되면서 영원히 왕위 계승분쟁에서 배제 됩니다. 
다만 명주지역의 본가는 살아남아 독자적 호족으로 후삼국시대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ps. 
왜 원성왕도 수양대군이고 손자 헌덕왕도 수양대군이라고 물으시냐면, 김영철씨는 태종도 했고 세조도 했으니까요.

조선이 500년간 물레방아가 없었다구요? 전혀. 사(史)담

요새 이런 글이 돌아다니는 모양입니다. 대충 중요한 부분만 인용하면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인은, 500년의 세월동안,
일본이나 중국에 있던 물방아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자력으로 물레방아(수차)조차 양산할 수 없었다.


이하는 한국에 있고, 물레방아 도입을 목표로 한 고생의 기록이다. 눈물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1429 세종 11년 12월 3일 일본의 물레방아가 굉장하다고 보고함.
1430 세종 12년 9월 27일 물레방아를 만들려고 한다
1431 세종 13년 5월 17일 '중국이나 일본도 물레방아의 이익을 얻고 있지만 우리 조선에는 그것이 없다'라고 기술.
1431 세종 13년 11월 18일 일본과 중국의 물레방아 연구의 기술을 봄.
1431 세종 13년 12월 25일 물레방아 도입을 시도한다.
1451 문종 원년 11월 18일 20년에 걸친 물레방아의 도입 실패.
1488성종 19년 6월 24일 물레방아 도입 시도(성공 여부 불명)
1502연산군8년 3월 4일 물레방아 도입 시도(성공 여부 불명)
1546 명종 원년 2월 1일 물레방아 도입의 시도. 류큐(오키나와)와 중국으로부터 복건식 물레방아 수입.


이후 백년간 물레방아의 기술이 없음. 반면, 이웃한 일본에서는, 포르투갈로부터 총포 전래 후 3년째에는 벌써 양산 체제.


1650 효종 원년 5월 15일 물레방아 도입의 시도 30년 기술 없음 한편 이웃의 일본에서는, 총양산 10만정

1679 숙종 5년 3월 3일 물레방아를 만들게 했다고 기록함. 그리고 70년 기술 없음.
1740 영조 16년 4월 5일 물레방아등이 없어졌다. '효종대왕상반료심수차지제어외방, 금무견존자(孝宗大王嘗頒遼瀋水車之制於外方, 今無見存者)'

1740 영조 16년 11월 20일 물레방아를 만들게 했다고 기술함.(18세기 시점에서 일부러 기록에 남겼다)
1764 1763-64년의 조센 통신사「일동장유가」(정성(淀城)의 물깃기를 통해 물방아의 감상)

'그 구조의 교묘함은 본받아 만들고 싶을 정도다.'라고 기술함.

1795 정조 19년 2월 18일 물레방아지제에 대해 활발히 나온다. 즉 시작중.
1811 순조 11년 3월 30일 이때 기술로 "물레방아는 필요한가?」";;;
라고 쓰여져 있어 전혀 보급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한국인이 물레방아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고심하고 있었던 것에 관계해서는,
1880년대가 되어도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에는 관개 설비가 없다.물레방아도 없다'

라고 미개성을 한탄하고 있다.

 

즉, 박단생(朴端生)이 1429년에 일본에 오고 물방아를 보고 나서

500년 가깝운 시간동안에, 물방아를 자력으로 만들어, 실용화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


과연 그럴까요? 물시계를 만들던 나라가 물레방아를 만들지 못했다?

일단 물레방아란 것은 개념 자체는 중국 삼국시대에 이미 개발된 것입니다. 그 자체를 못만들리는 없지요. 국사 편찬 [신편] 한국사를 인용합니다.

(2) 물레바퀴

 물레바퀴(水車)는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이전의 가장 중요한 동력장치였다. 물레바퀴는 정곡·제분용 물레방아의 동력으로써, 그리고 관개·수리용 양수기로써 우리 나라에서도 고대로부터 널리 쓰였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물레바퀴 사용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한 가지,≪고려사≫에 기록된 물레바퀴 이용에 대한 기사가 있을 뿐이다. 공민왕 11년(1362)의 기사에 의하면, 중국농민들은 수차를 이용하여 한발을 이겨내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저수지와 제방을 쌓아 물을 끌어대는 것에 의존할 뿐 수차를 써서 물을 쉽게 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관에서 수차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장려하도록 해야 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기사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물레바퀴가 관개용 양수기로서 일반화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0428)

 바꿔 말하면, 고려에서는 관개수리사업으로 저수지와 보를 이용하는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적 방법을 쓰고 있었고, 물레바퀴는 주로 탈곡·제분용 물레방아에서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에서도 물레바퀴를 양수기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노력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성공한 것 같지 않다. 똑같은 제안과 노력이 조선시대 세종 때에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레방아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특별히 기록할 만한 기술적 개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레방아를 못만든게 아니라 양수기로서의 물레방아, 유식하게 말해서 스스로 도는 자전 물레방아를 못만든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못만든거구요.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세종실록 46권, 세종 11년 12월 3일 을해 5번째기사 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박서생이 시행할 만할 일들을 갖추어 아뢰다




1. 일본 농민에게 수차(水車)를 설비하여 물을 퍼 돌려 전답에 대는 자가 있기에, 학생(學生) 김신(金愼)으로 하여금 그 수차를 만든 법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수차가 물을 타고 저절로 회전하면서 물을 퍼 올려 대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 전년에 만들었던 수차인 인력(人力)으로 물을 대는 것과는 다른데, 다만 물살이 센 곳에는 설치할 만하오나, 물살이 느린 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습니다수침(水砧)129) 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록 물살이 느리더라도 사람이 발로 밟아서 물을 올린다면 또한 물을 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간략하게 그 모형을 만들어 바치오니, 청컨대 각 고을에 설치할 만한 곳에 이 모형에 따라 제작하여 관개(灌漑)의 편리에 돕도록 하소서.
[註 129]
수침(水砧) : 물방아.


이 대목에 주목해주십쇼. 물살이 세다면 설치할만하나, 느린 곳에는 설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중국이나 일본도 물레방아의 이익을 얻고 있지만 우리 조선에는 그것이 없다'는 대목을 찾아봤습니다.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5월 17일 경진 6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수차의 설치를 위하여 이온·오치선·박결·조곤 등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다
"수차 감조관(水車監造官)의 수본(手本) 가운데에, ‘만약 전답(田畓)이 다 마르지 않은 때에 왜수차(倭水車)를 쓴다면, 2인이 하루 동안의 역사(役事)로서 여러 무(畝)의 전답을 관개(灌漑)할 수가 있다. ’고 하였으니, 마땅히 각도에 공문을 보내어 미리 수차(水車) 만들 재목을 준비하게 하여 장인(匠人)들에게 만들도록하고, 아울러 둑[陂澤]에 나아가서 세찬 수세(水勢)를 익히게 하여 농민으로 하여금 즐겨 쓰도록 하고, 당수차(唐水車)163) 도 아울러 만들도록 하고, 외방의 장인들이 능히 전해 익혀서 관개하는 데 이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사에게 그 실제의 효과를 상고하여 계문해서 그 공을 상주게 하소서."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5월 17일 경진 6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수차의 설치를 위하여 이온·오치선·박결·조곤 등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다

"신이 철원 수원에 가서 수차(水車)를 설치(設置)한 상황을 살펴보니, 기계는 모두 갖추어졌으나, 사람을 시켜서 물을 올리게 하니, 즉시 새어 버려 관개(灌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지신사 안숭선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태종 때에 우희열(禹希烈)이 제방(堤防)을 감독해 쌓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여러 사람의 질책을 무릅쓰고 하므로 태종께서 칭찬하셨는데, 그 뒤에 쌓은 제방이 완실하지 못한 것이 퍽 많았으나, 관개에 이용할 만한 곳도 많아서 백성들이 많은 이익을 받았다. 지금 국가의 일에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는 자가 적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로다. 수차의 설치는 원래 한재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받들어 행하는 관리가 모두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자갈땅에 설치하여 쓰지 못하게 되니 심히 부당하다. 위로는 중국으로부터 아래로는 왜국(倭國)에까지 모두 수차의 이익을 받는데, 어찌 우리 나라에서만 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내가 여기에 마음을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급하게 백성들에게 이익을 보게 하려고 함이 아니다. 나는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 것이니 꼭 이일을 맡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각도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공조에서 아뢰기를,

"왜수차와 당수차(唐水車)177) 를 만드는 장인을 경기도 충청도에 모두 1명을, 전라도 경상도에 모두 1명을 뽑아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만든 게 문제가 아니라, 설치가 물이 없는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번엔 '1451 문종 원년 11월 18일 20년에 걸친 물레방아의 도입 실패.'라는 대목을 직접봅시다. 글쓴이의 취사 선택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선왕(先王)께서 이를 염려하여 수차(水車)1568) 의 법(法)을 세웠다. 그러나 본국(本國)은 토양(土壤)의 성분이 푸석하여 물을 받을 수 없는 까닭에 수차의 법은 마침내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를 생각하여 보니, 천지(天地) 사이에는 생의(生意)가 널리 행(行)하여, 비는 적시어 주고 해는 말리어 주는 것이 자상(仔詳)하고 은근하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크지만 반드시 유감이 있어서 혹은 큰 물을 내기도하고 혹은 가뭄을 일으키기도 하여 인위(人爲)와 같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늘은 반드시 사람에게 손을 벌리어서 사람이 능히 재량하여 만들고 도와준 뒤에야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극진히 하고서 하늘에 기대하면 천은(天恩)을 바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왕(先王)이 수차(水車)에 유의(留意)하시던 뜻을 생각하고 또 금년에는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므로, 밤낮으로 뜻을 계승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이 되는 소이를 생각하니, 일로서는 하천의 제방과 관개와 같이 급한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 나라는 개벽(開闢)한 이래 나라를 세운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만약 관개할 만한 곳이 있었으면 옛날 사람들이 이미 다하여 지금은 반드시 새로 이용할 곳이 없을 것이다.


이후로도 조선은 계속 전국에 물레방아를 보급하려고 합니다. 잠곡 김육이나 연암 박지원도 중국에서 들여온 수차를 보급했다는 것이 버젓히 업적으로 나와있고, 특히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 때 수차의 보급에 적극 나섰습니다. 물론 이런 수차들이 다 같은 수차일 수는 없겠죠. 개량형 수차라는 이야기입니다. 

인용한 글의 후반부 내용은 그냥 '수차를 만들게 했다'는 구절을 악의적으로 해석한 취사선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수차가 검색되지 않으면 '성공여부 불명', '그리고 70년간 기술 없음' 등으로 코멘트 하는 것은 구차하고 찌질하기 까지 합니다.) 

끝으로 순조시대 '수차가 필요한가?'라는 날짜의 기사(1811 순조 11년 3월 30일)를 봤습니다. 그런 인용은 없었습니다.  

"경상도의 진폐 책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안동(安東)의 세은(稅銀)에 관한 것은 숫자가 너무 적어 보잘것 없으니, 특별히 영구히 감하여 줄 것을 해조(該曹)에 분부토록 하고, 제읍(諸邑) 가운데 금산(金山)·함창(咸昌) 두 고을의 수령이 진달한 바가 가장 수고로움이 크고 채택할 만한 것과 다른 제읍에서 조진(條陳)한 내용 가운데서도 시행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본읍(本邑= 여기서는 안동)은 곡식이 귀하고 주민들은 가난하니 한전(旱田)의 밭두둑을 잇달아 물을 끌어 대어 논[畓]으로 개간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 해의 풍흉은 오로지 수전(水田)에 물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으며, 길고(桔槹)073) 로 물을 대는 것은 그 힘이 작아서 수차(水車)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백성들의 풍속이 평소의 습관에만 익숙하고 처음 보는 것에는 관심이 적어 비록 수차가 있다 하더라도 필시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관아에서 앞장서 권고하여 따라 익혀서 익숙하게 한다면 반드시 시행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한번 이용해 본 뒤에 이로우면 반드시 일반화 될 것입니다. 본도(本道)의 창원(昌原)에서는 이미 이 법을 시험삼아 사용한 적이 있으며 또한 성과를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본주(本州)에서 역시 이 사례를 본받아 편리한 대로 시험삼아 이용해 보라는 뜻을 도신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당 읍에 모두 알리게 하소서.

이 때가 되면 (당연히) 수차는 전국적으로 퍼져있었고, 남도형과 북도형이 나눠져있었습니다. 물론 주된 활용처는 수자원이 많은 곳 위주였습니다. (강원이나 경남 함양 등). 그걸 영남의 각 고을로 퍼트리자는 이야기입니다.

과학기술이란 본디 토질과 자연환경에 맞게 쓰여야합니다. 상대적으로 물이 부족한 한반도와, 물이 풍성한 일본간의 기술이 동일할 수는 없죠. 탈곡/제분용 물레방아야 어디나 쓰였습니다. 하지만 물을 퍼내는 관개용 물레방아는 수압이 충분해서 스스로 물을 퍼올릴 수 있어야 쓸 수 있는 겁니다. 조선에는 이를 적용할 수 있는 지역이 많이 없었습니다. (해석에 따라서는 화폐제도처럼 아직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는데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대왕님의 시도로도 볼 수가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빗대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풍력발전이 좋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풍력발전을 만들어도 이익을 보지 못하는 나라가 풍력 발전기를 전국에 뿌리는 것은 국력의 낭비인 것이죠. 관개용 수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살이 강하지 못한 조선의 토양에서, 수차는 적극적으로 사용되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 힘이 더 싸게 먹힌다 이 말입니다. 농사를 위한 실용적인 기술인데, 기술을 위한 기술을 쓸 수는 없는 것이죠.

사신들이 외국에 가서 필요한 실용물자를 샅샅이 확인하고 이를 계속 적용하려는 태도를 국가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자랑거리면 자랑거리지, 조롱할 것은 아닙니다. 세종-문종 조의 기사는 도리어 과학기술, 특히 농업기술에 대한 조선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는 사료일 수는 있어도, 기술력이 없는 '미개한' 증거일 수는 없는 것이죠.

끝으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물레방아는 산간오지 화전민들이 쓰던 강원도 정선의 120년 된 물레방아입니다. (김홍집 운운하는 바로 그 시대의 물레방아입니다.) 지금도 돌아갑니다. 강원도 정선 백전리와 삼척 한소리의 주민들은 아직도 이 물레방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문명을 저급 문명으로 취급하면 현재의 자신이 홀로 깨어있는 사람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활한 자기 성품이나 드러내는 꼴이죠. 

이양법이나, 이모작도 단순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죠. 고려시대에 이미 일본은 이양법과 이모작을 하고 있었다구요. 그럼 동남아는 삼모작도 가능했으니 동남아가 최강 농업 선진국일까요?

한줄 요약 : 이게 다 온라인 조선까 역덕들이 글로 농사를 지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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